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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마을의 17년 해바라기 꽃 필 무렵
나경희, 장일호
사진
이명익

늙고 병드는 일은 자연의 몫이었다. 세월만이 사람을 시들게 했다. 그런 줄만 알았다. 어떤 죽음은 자연스럽게 오지 않았다. 작은 시골 마을은 언제부턴가 장례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이웃의 죽음은 예고편이었다. 한 집 건너 한 집에 암 환자가 발생했다.

전북 익산시 함라면 신등리 장점마을. 2001년 7월 가동을 시작해 2017년 4월 문을 닫은 비료공장 ‘금강농산’은 장점마을과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담배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연초박’을 사용해 비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발암물질이 17년간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주민 88명 중 18명이 피부암과 폐암 등 각종 암으로 숨졌고, 12명이 암으로 투병 중이다.

2019년 11월 정부는 금강농산과 장점마을 집단 암 발병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정부가 환경오염 피해로 인한 비특이성 질환의 역학적 관련성을 인정한 첫 번째 사례였다. 금강농산은 문을 닫았지만 삶은 계속된다. 장점마을 주민들은 ‘피해자’ 이전에 제 삶의 주인공이었다. 암 환자 ‘아무개’가 아닌 얼굴과 이름을 찾아주고 싶었다. <시사IN> 취재팀은 지난 2월10일~3월1일까지 장점마을에 머물렀다. 이들이 경험한 질병과 소외의 역사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21세기 현대사다.

part 1.
장점마을에
사는
사람들
자빠지지 말라고 이름을
‘세모’로 지었지.

흙을 만지는 동안은 잡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손평숙(74)은 매년 봄이면 씨를 받는다. 올봄에도 어김없었다. 씨 받을 배추는 겨우내 베어 먹지 않고 한 줄 길게 남겨둔다. 아이 키만큼 꽃대가 올라올 즈음이면 어김없이 꽃대마다 씨가 맺혔다. 배추꽃은 꼭 유채꽃처럼 생겼다. 노란 꽃이 다 지면 종자가 남는다. 마른 꽃대를 베어 털면 씨가 떨어진다. 잘 보관했다가 늦가을에 심는다. 지난해에도 그렇게 심은 토종 배추인 경종으로 1000포기 넘는 김치를 담갔다. “이제는 토종 씨가 드물어. 국보가 별거 있나. 이게 국보지.”

손평숙은 장점마을에서 태어났다. 한동네 살던 문병준(75)과 결혼해 3남1녀를 두었다. 때로는 담을 넘는 일도 불사하며 쫓아다니던 문병준은 결혼 17일 만에 군대에 가버렸다. 손평숙은 일곱 살짜리 시동생을 돌보는 와중에 시조부모와 시부모를 모셨다. 아궁이 세 개를 쉴 새 없이 돌리며 3대 살림을 해냈다. “그때는 다 그러고 살았어. 그러니 지금이 얼마나 살 만하겠어(웃음).”

하지만 비료공장인 금강농산이 들어선 2001년 이후 새로운 근심이 생겼다. 자식과 손주들이 집에 올 일이 생기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늘은 저놈의 공장이 또 무슨 냄새를 피울라나.”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장이 벌렁거리는 악취였다. 공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집이지만 냄새가 닿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아이들에게 서운했다가도 건강이 염려되어 자신이 먼저 아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전북 익산시 함라면 신등리 장점마을. 너른 평야를 좌우에 두고 길게 뻗은 길을 중심으로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 입구 표지석에서 신호등도 없는 폭이 좁은 도로를 건너 작은 터널 하나를 지나면 낮은 언덕이 나온다. 조금만 오르면 오른편으로 파란색 슬레이트 건물이 눈에 띈다. 금강농산이다. 2001년 7월 가동을 시작해 2017년 4월 문을 닫았다. 금강농산은 담배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연초박을 이용해 유기질비료를 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제1군 발암물질이 발생했다.

손평숙과 문병준도 장점마을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한다. 처음에는 자고 나란 마을을 떠나 서울에서 열었다. 전기배선 기구 연결장치를 제조하는 공장은 한때 서울 청계천 일대에서 거래하지 않는 매장이 없을 정도였다. 문병준은 단가를 낮춰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미수금을 돌려받지 못하면서 1988년 크게 망했다.

서울에서만 공장을 하란 법은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1990년 9월 집 마당에 별채를 짓고 ‘세모전자’ 간판을 걸었다. “하도 크게 망해서 앞으로는 자빠지지 말라고 이름을 ‘세모’로 지었지.” 이번에는 사업을 확장하지 않았다. 인근 마을 사람만 채용해 고정적으로 납품하는 물량만 소화한다. 한때 20명 가까이 뒀던 직원은 현재 4명이다. 두 사람과 함께 세모전자도 늙었다. 나이를 이기는 ‘업’은 없었다.

24시간 가동됐던 금강농산은 여러 의미로 빠르게 마을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악취나 오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2002년 문병준은 금강농산 바로 아래 밭 주인이 누군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밭과 밭 사이에 난 좁은 포장도로는 농기계가 올라가기 위해 임시변통한 길로 사유재산이었다. 익산 시내로 이사간 밭주인을 찾아가 3년치 세를 받았다. 포클레인을 불러 공장 들어가는 입구를 파버렸다. 연초박을 비롯한 온갖 폐기물을 실어 나르는 차량 통행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일로 금강농산으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검찰 조사도 받았다. “내가 오죽하면 공장 굴뚝에 올라가서 떨어져 죽을라고 했을까.”

금강농산 이갑찬 대표는 적절히 돈을 풀어 민심을 달래곤 했다. 마을 대소사며 애경사를 챙기는 ‘바지사장’도 따로 있었다. 주민들은 아직도 그가 타고 다녔던 흰색 다이너스티 차량 번호를 똑똑히 기억한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두에게 주지는 않았다. 돈을 받은 일부 주민은 공장을 상대로 데모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조용한 마을에 괜한 분란을 일으킨다는 이유였다. 금강농산은 그 틈을 적절히 비집고 들어오는 법을 알고 있었다. 공장을 적으로 둔 싸움은 오랜 시간 일방적인 패배로 끝나곤 했다.

그 사이 수많은 마을 주민이 아프거나 죽었다. 3분의 1이 암을 겪었다. 2020년 4월30일 기준 마을 주민 88명 중 18명이 암으로 숨졌고, 12명은 암으로 투병 중이다. 문병준도 2012년 위암을 얻었다. 이미 마을을 떠난 사람 중 일부도 죽었거나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오곤 했다. 마을 주민들이 걸린 암의 종류는 다양했다. 금강농산발 발암물질은 암만 일으킨 게 아니었다. 암은 마을을 덮친 대표 질병일 뿐 각종 피부질환과 우울증 등은 일일이 집계하기도 어려웠다.

금강농산 노동자 중에도 암 환자가 있었다. 이갑찬 금강농산 대표도 피해가지 못했다. 그는 2018년 폐암으로 숨졌다.

인터뷰를
1000번은 한 거 같아.

집에 찾아온 손님이 한라봉 상자를 건넸다. 최재철(59)은 잠시간 말없이 눈으로 내용물을 훑었다. 하나를 골라 껍질 일부를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제일 좋아 보이는 과육이었다. 대화 중이라는 것도 잠시 잊었다. 최재철은 한라봉을 들고 아버지 영정과 위패를 모신 방으로 들어갔다.

장점마을은 인근 20여 마을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촌이었다. 부촌임을 짐작하게 하는 조명 전등갓과 천장에 그려넣은 화려한 무늬는, 그러나 촌스럽고 오래전 것이었다. 한때 대가족이 살았던 최재철의 집에는 냉장고가 두 개, 김치냉장고가 하나 있었다. 그 안의 물건들은 어딘가 풀죽어 있거나 상해 있었다. ‘장점마을 주민대책위원회(주민대책위)’ 위원장을 맡은 이후 “화를 추스르기 어려웠다”라는 그의 속내가 냉장고 속 음식으로도 드러나는 듯 했다.

아내와는 오래 전 이별했고, 성장한 아이들은 결혼을 하거나 유학길에 올랐다. 혼자 몸만 책임지면 되는 가뿐한 상황에서 최재철이 2016년 고향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민대책위 조직이었다. 암 사망자와 투병자를 자체적으로 조사해 금강농산으로 인한 피해 규모를 확인하고 기자회견을 여는 등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지역 공무원들을 움직이려면 언론을 잘 활용해야 했다. 매체를 가리지 않았다. “거짓말 아니고 인터뷰를 한 1000번은 한 거 같아.”

최재철이 고향으로 돌아온 건 2012년 피부암과 폐암을 진단받고 와병 중인 아버지 최옥엽을 돌볼 사람이 마땅치 않은 점도 한몫했다. 가려움 때문에 피가 날 때까지 긁고서야 겨우 쪽잠을 주무시던 아버지는 큰아들 최재철이 마을 문제에 앞장서자 긍긍했다. “내가 해코지당할까 봐. 어른들이 뭘 아나. 저놈의 공장 때문에 죽는다고는 생각 안 했다고. 나이 먹어서 아픈가 보다, 나이 먹어서 죽는가 보다 했지.” 2019년 1월 최옥엽은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장례를 치르고 한참 지나보니 그때 받은 조의금이 주민대책위 활동비가 됐다.

마당을 드나드는 길고양이 밥을 챙기고 유난히 많은 식물 화분에 물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모두 아버지가 해오던 일이다. 생명이 있으나 말없는 것을 돌보고 가꾸는 동안 최재철은 아버지가 지녔을 내면의 풍경을 떠올렸다. 불같은 성격의 최재철과 달리 아버지 최옥엽은 장점마을에서 유순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어른이었다. “아, 내 성격은 어머니 쪽이지.” 어머니 안병심은 요양원에서도 ‘대장’을 하고 있다고, 최재철이 웃었다.

2019년 11월 환경부는 690쪽에 달하는 ‘장점마을 환경오염 및 주민건강 실태조사’ 보고서를 내놓았다. 장점마을 집단 암 발병의 원인이 금강농산임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목숨을 증거 삼아 얻은 결과였다. 농업용수로 쓰는 소류지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고, 밭과 논에서 나는 농작물이 형편없이 망가졌을 때도 꿈쩍 않던 지자체가 보고서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익산시장과 전북 도지사, 지역구 국회의원, 환경부 장관과 국무총리까지 사과가 이어졌다.

하이고,
폭폭하니 못 살아, 아주.

텔레비전 볼륨은 둘러앉은 사람들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컸다. KBS1 <뉴스 9>에서는 코로나19 사망 소식이 전해지는 중이었다. 73세 노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있던 하영순(78)이 혀를 찼다. “일흔셋이면 한창 땐디…” 김영환은(82)은 콜라 반 잔을 마시고 거실 소파에서 잠시 앉아 졸았다.

부부의 발밑에는 셋째 딸이 보낸 신발 상자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영순 앞으로 두 개, 김영환 앞으로는 하나였다. 그중 두 켤레는 모양은 같고 색만 다른 커플 운동화였다. 키 차이가 제법 나는 두 사람이지만 발 크기는 250mm로 같았다. “병원 갈 때 신고 다니라고 보내준 거여.” 하영순의 설명에 부스스 눈을 뜬 김영환은 무심한 얼굴로 상자에서 신발을 꺼내 끈을 뀄다. 신발을 신고 거실을 걷는 걸음은 신중했다. 2013년 위암 수술 후 67kg 나가던 김영환의 몸무게는 51kg으로 줄었다.

“주민들을 돌라먹은(속인) 거야. 역학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꼼짝 못하고 당했어.” 금강농산이 처음 장점마을에 들어온 2001년, 김영환은 이장을 맡고 있었다. 이갑찬 금강농산 대표를 만났다. 비료공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주민들 걱정이 많으니 마을회관에 와서 설명회를 하라고 요청했다. 늦게나마 오긴 왔다. 이갑찬은 당당했다. “마을 주민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야. 대답이 간단하더라고. 나중에 냄새가 하도 나서 쫓아 올라갔더니 그래. ‘빵 냄새, 땀 냄새처럼 사람마다 좋아하는 냄새가 다 다르다. 공장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걸 다 어떻게 맞추냐.’ 참 뻔뻔하지.”

금강농산에서 나온 유해물질은 암 외에도 각종 질병을 유발했다. 대표적으로 피부질환이다. 하영순은 피부 가려움증과 우울증으로 이틀 걸러 하루꼴로 병원에 간다. “수면제 없이는 잠을 통 못 자. 밥보다 약이 더 많아. 하이고, 폭폭하니 못 살아, 아주.”

함라산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 형태의 마을은 기류 확산이 잘 되지 않았다. 금강농산에서 시작된 악취와 매연은 고스란히 마을로 고였다. 하영순이 지금도 아프게 기억하는 ‘사건’이 있다. 2015년 공무원인 셋째 딸이 군산에 출장 온 길에 동료들과 함께 집에 들르겠다고 했다. 한창 음식을 마련하고 있는데 딸과 동료들이 탄 차가 마당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어, 이게 무슨 냄새야?’ 하면서 숨을 못 쉬겠다고 손으로 코를 잡고 뛰어 들어오는 거야. 나보고 그래. 어머니, 이 냄새 맡고 살면 안 된다고.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 직원들이 나가면서 마스크 있으면 좀 달라고 해. 있는 거 다 집어줬지.”

현재 생존한 장점마을 주민 대부분은 이곳에서 태어났거나 20대 초반 결혼과 함께 인근 지역에서 이주해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40여 가구 중 2000년대 이후 장점마을로 이주해온 집은 여섯 가구이며, 이들 중 속초에서 온 한 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인근 마을 출신이다. 1940~1950년대 생이 제일 많고, 평균연령은 59세다.

종교적 동질성도 매우 높다. 마을 주민 90%는 천주교를 믿는다. 익산은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 가운데 한 곳이다. 장점마을에서 17km 떨어진 곳에 나바위성당(1907년 건립)과 성지가 있다.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사제로서 첫발을 내디딘 곳에 세워졌다. 전북 지역에는 지금도 약 100여 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교우촌이 있다. 장점마을도 그 중 한 곳이다. 마을에는 세워진 지 60년 넘은 공소(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예배당)가 있다. 공소는 한 달에 한 번 열린다.

미사는 오후 7시에 시작되지만 9년째 공소회장을 맡고 있는 최석환(65)은 공소가 열리는 날이면 오후 일을 뺀다. “신부님 의자 싹 닦고 그랄라믄 일찍 와야제.” 공소 뒤로 금강농산이 보였다. 공소에서만은 아니다. 금강농산 건물은 마을 어디에서나 잘 보였다. “저 공장이 멈추고 나서는 공기가 아주 싱겁더라고요. 제가 아들한테 이 말 했더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난리야(웃음).”

할머니들은 평소에는 보기 힘든 차림새를 한 채 공소 방향으로 난 언덕길을 올랐다. 가장 깨끗한 옷과 구두를 갖춰 입고 화장도 했다. 김광석 요아킴 주임신부는 단상 아래에서 주민들과 눈을 맞췄다. 강론은 설교라기보다 대화에 가까웠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사람만의 이야기. 그걸 우리는 다른 말로 표현해서 역사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고통스럽게 경험했던 금강농산 문제도 여러분만의 역사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나 기록을 남겨두지 않으면, 흐지부지 날아가버리는 거예요. 남기지 않으면 평가를 할 수 없어요. 이 문제를 기억하고 있는 여러분이 죽어버리면 다 끝나버려요. 우리가 걸어온 길이 정리가 돼야만 앞으로를 설계할 수 있어요.”

하느님은 아시겠죠.
제가 왜 성당에 안 나가는지.

1998년 추석 때 시댁에 내려왔다가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마을에 눌러앉았다. ‘1년만 몸조리하고 가라’는 시어머니의 말이 20년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이미은(57)은 장점마을에서 드문 ‘외지인’이다. 농사를 짓고 마을 이장도 하면서 마을 주민과 부대끼는 동안 세월도 속절없이 흘렀다. 이미은은 이웃 마을에서 장점마을에 보내는 호기심이 불편하다.

“정말 장점마을 꼬리표를 떼고 싶어요. 보상 얼마 받느냐고 물어봐요. 이 마을 사람들이 무슨 보상받으려고 아픈 사람들도 아닌데. 저도 텔레비전에서 철거민 같은 사람들 보면 ‘왜 이사를 안 갈까’ 생각했는데, 제가 이번에 정말 잘 알게 됐어요. 이사를 쉽게 갈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내가 어딘가로 이사 갈 때 그곳에서 뭘 먹고 살지, 그런 계획이 다 세워져야 가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천주교 신자인데 지금은 냉담자예요. 하느님은 아시겠죠. 제가 왜 성당에 안 나가는지.”

이소현(57), 김상호(58) 부부는 2011년 익산 시내에서 장점마을로 이주했다. 자녀를 일찍 낳아 기른 덕분에 이른 ‘노후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큰딸은 결혼 시키고, 아들도 독립했다. 때마침 김상호와 익산 시내 한 택시회사에서 함께 일하며 호형호제했던 김형구가 부부의 계획을 알고 장점마을 내 빈집을 소개했다. 형태만 겨우 남은 초가집만 덜렁 있던 터를 닦아 잔디가 깔린 전원주택을 마련했다.

원주민이 아니었던 부부에게 흉흉한 소문은 뒤늦게 도착했다. 이소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이 집터에 살았던 할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암이라는 게 워낙 흔하니까. 그런가보다 했죠.” 누긋해진 날씨와 함께 푸른 잔디가 뾰족 고개를 내밀 때면 인생의 낙이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집밖을 잘 나서지 않는 이소현과 화물트럭을 운전하며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김상호는 공장발 악취에 다소 무덤덤했다. 2013년 김형구 부모의 장례를 겪으며 두 사람의 무딘 신경줄도 굵어졌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소현은 2014년 자궁암을, 김상호는 2017년 위암을 얻었다. 운이 좋아 둘 다 초기에 발견했지만 생각할수록 아찔했다. “아무리 흔한 암이어도 한 마을에서 이렇게 자주 암이, 부부가 동시에 암으로 투병하는 집이 이렇게 여럿일 수는 없는 거잖아요.” 김상호가 투병을 시작했을 때, 이소현은 금강농산 방면으로 뚫린 다용도실 창문을 의심했다. 환기를 이유로 365일 열어두던 창문이었다.

이소현은 ‘공부’에 매달렸다. 동생 의료사고로 한 대학병원과 지난한 소송전을 벌인 경험이 있었던 이소현은 컴퓨터를 켜고 법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단순히 ‘악취가 심해요’ ‘냄새가 나요’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컴퓨터를 뒤지고 도서관에 환경문제 관련 서적을 빌리러 다니면서도 설마 했어요. 우리 같은 사람은 공장 관리책임이 있는 행정을 믿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도 다 허가받고 하는 걸 텐데, 안전하게 하지 않을까….”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한계가 있었다. 전문가 그룹인 민관협의회가 합류하면서 막막하기만 했던 길도 조금씩 방향이 잡혔다. 마을 어른들은 패배감이 완연했다. “우리도 옛날에 공장이랑 안 싸워본 거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업무방해로 검찰조사 받고 하면서 겁이 많아지신 것 같았어요.”

부부는 요즘 집을 비우는 시간이 더 길다. 이소현은 때마침 둘째를 낳고 ‘구조요청’을 해 온 딸네 집에서 머문다. 김상호도 일을 늘렸다. 집에서는 잠만 겨우 잔다. “친구들이 집 팔고 나오라는데 이런 상황에서 집이 팔리겠어요? 여기 정리되면 산으로 가야 하나 싶어. 공기 좋고 물 맑겠지 싶어서 시골로 왔는데 ‘자연인’ 되기 되게 힘드네, 그쵸?”

서류 몇 장으로 내가
당한 일을 어떻게 다 아느냐.

장점마을 주민들은 환경오염 구제신청을 포기했다. ‘환경오염 피해 배상책임 및 구제에 관한 법’은 환경오염 피해를 본 주민에게 정부가 금전적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다. 하지만 피해구제는 대상이 선별적이고 배상액이 적은 데다 추후 소송에서 이기면 반납해야 한다. 주민들은 선별적으로 나오는 보상이 작은 공동체를 깰까 봐 우려했다. 보상 액수와 관계없는 상징적인 ‘승리’를 원했다. 전북도와 익산시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으로 직행한 까닭이다.

소송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전북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전북 민변)에서 소송은 맡아줬지만 준비 서류를 떼는 건 각자의 몫이었다. 인터넷이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에게는 고역이었다. 멀리 사는 자식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열일을 제쳐두고 관공서와 병원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임증자(79)도 서류를 떼다가 부아가 치밀곤 했다. “서류 몇 장으로 내가 당한 일을 어떻게 다 아느냐”라는 말에서 뼈가 만져졌다. 임증자는 2017년 시어머니 김양례(당시 90세)를 피부암으로 잃었다. 2013년 발병해 5년을 병수발 들었다. 그 세월은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실 협탁 위에는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고추 10근, 팥 10kg, 콩 서리태 10kg, 쥐눈이 5kg, 메주콩 20kg, 마늘 5접.’ 익산시청에서 수매해주겠다고 적어두고 간 종이였다. 말이 수매지 폐기처분이었다. 임증자가 가장 성질이 나는 건 ‘집단 암 마을’이라는 낙인이다. 평생 해온 것, 할 줄 아는 것을 간단히 짓밟혔다. 몇 년 전부터 장점마을에서 나는 농산물이 팔리지 않기 시작했다. 익산 백제병원 앞에서 알음알음 거래했던 농산물 판로도 막혔다. “장점마을 거는 안 산다는 거야.”

금강농산은 문을 닫았지만, 한 번 난 소문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게 폿(팥)이여. 봐봐, 여기 나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이렇게 큰 폿 봤나. 팥죽을 쑤면 또 얼마나 맛있는디. 우리가 먹을라고 우리가 직접 길렀응게 맛이 없을 수가 없제.” 광에 들어선 임증자가 굽은 허리를 달래며 농산물 푸대를 풀었다.

2월20일 경로당 앞마당에서 간이 수매장터가 열렸다. 익산시청 미래농정국 농산유통과에서 보낸 화물트럭 한 대와 봉고트럭 두 대가 들어왔다. 마을 방송이 나가고 얼마 뒤, 임증자를 비롯해 모두 8가구에서 작물을 이고지고 나타났다. 이날 익산시청이 수매한 작물은 총 2519t였다. 무가 개당 200~300원으로 ‘똥값’이었다. 일단 창고로 옮긴 뒤 환경정책과에서 처리할 예정이다. 이병학 환경오염대응계장은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 수매는 하지만 장점마을 작물을 사주는 게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인식돼서 안 좋은 이미지만 고착화 될 까봐 좀 걱정이 돼요.”

엄마 병실에서 제일
잘 보이는 데 차를 댔어요.

많은 물건에는 세월이 묻어 있었다. 가늠하기 어려운 세월은 찐득거리거나 어딘가 상한 얼굴로 나타나서 당황시킨다. 이주는커녕 이사할 일도 없이 정주한 사람들의 살림에는 모두 이야기가 숨어있다.

오래된 살림은 그들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끄집어냈다. 지난 2월17일부터 장점마을 40여 가구 모두 순차적으로 도배 및 장판을 교체했다. 역학조사 이후 익산시가 시행하는 장점마을 지원사업 중 하나다. 금강농산 운영 중에 배출된 발암물질 담배특이니트로사민(TSNAs) 등 각종 유해물질은 먼지나 검댕의 형태로 벽이나 문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때문에 지원사업 예산 중에서도 가장 빨리 편성됐다.

이원애(82)는 도배와 장판 교체를 앞두고 1960년 시집올 때 누벼서 가져온 최고급 솜이불을 2020년 장롱 안에서 꺼냈다. 그 이불 속에서 자란 아이들과 무뚝뚝한 남편과 고된 시집살이는 당신 20대 전부이기도 했다. 창고를 열자 쏟아진 책과 흙 묻은 신발은 2004년 급성위암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둘째 아들 김주엽(당시 35세)의 것이었다. 이원애는 그 물건들 앞에 그저 망연히 앉아 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짐을 정리한다는 건 기억을 정리하는 일이다. 이원애는 그 짐에 묻어 있는 이야기를 ‘감히’ 정리할 수 없었다. 미래에 가지고 갈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할 수 없는 사람은 이원애처럼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평생 끝나지 않을 애도의 한 모습이었다.

“내가 아들 둘, 딸 둘을 낳았어. 2남2녀라고, 딱 좋다고 했는데. 1남2녀가 돼부렀어.” 주엽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물을 끓여 말아 먹으려고 했는데 전기포트가 말을 듣지 않았다. 불은 들어오는데 작동이 안 되었다. 이원애는 밥그릇을 밀어놓고 두유 하나를 꺼내 마셨다. 빈속은 아니니 괜찮을 것이다. 어지럼증, 혈압, 당뇨, 관절약 따위를 털어 넣었다.

악취가 심한 날이면 남편은 이원애에게 바닥으로 몸을 최대한 낮춰서 누워보라고 권했다. 그 말에 의지해 장판에 얼굴을 붙여도 악취로 인한 두통은 잦아들지 않았다. 2017년 공장이 문을 닫고 악취가 사라졌다. 그리고 바닥에 얼굴을 붙여보라던 남편 김순길도 이제는 없다. 김순길은 담낭암을 앓다가 2009년 71세의 나이로 숨졌다. 이원애는 김순길이 유명을 달리한 건 주엽을 잃고 화병이 난 것도 한몫했다고 여긴다. 그럴 때면 ‘왜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느냐’고 신에게 물었다.

‘그날’에 붙들려 있는 사람이 이원애만은 아니다. 박명숙(54)은 2013년 어머니 황임순(당시 74세)을, 2014년 아버지 박노섭(당시 76세)를 연달아 여의었다. 모두 폐암이었다. 5남매 중 둘째 딸인 박명숙은 부모와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떠맡듯 병구완을 시작했다. 두 분 다 투병 기간은 짧았다. 어머니가 1년, 아버지가 9개월을 앓다 돌아가셨다. 익산 시내에 살던 박명숙과 달리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바쁜 형제들은 드물게 병원에 왔다. “엄마가, 아빠가 진짜 아플 때 어떤 모습인지 형제들은 끝내 모르겠죠.” 그래도 ‘편히’ 돌아가셨다는 형제들의 위로를 박명숙은 이해했고, 또 이해하지 못했다.

황임순은 2012년 자꾸만 쿡쿡 쑤시는 옆구리가 불편했다. 의사는 보호자인 박명숙을 불러 물었다. “엄마가 ‘담배 피우느냐’라고 물어요. 안 피운다, 음식도 태운 건 질색하는 분이라고 했죠. 그랬더니 ‘주변에 공장이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있긴 있다고 했죠. 그때만 해도 설마 했어요.” 검사 결과 암 발병 부위가 좋지 않아 수술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박명숙은 20년 가까이 끌고 다니던 자동차를 당시 최신형이었던 쉐보레 크루즈로 바꿨다. 어머니를 태워 병원과 집을 오가는 동안 오래된 자동차를 불안해하던 모습이 기억나서였다. 안심시켜드리고 싶었다. 새 차를 뽑은 날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한다. 2013년 5월7일이었다. “차 뽑자마자 급하게 몰고 엄마 있던 요양병원으로 갔어요. 엄마 병실 창문에서 제일 잘 보이는 데 차를 댔어요. 올라가서 엄마한테 새 차를 가리키며 그랬어요. ‘엄마, 저거 봐봐. 저기 흰 차가 내 차야. 이제 저거 타고 집에 가자.’ 그랬더니 엄마가 ‘내가 이제 마음이 놓인다’고 좋아하더라고요.” 황임순은 결국 둘째 딸의 새 차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병세가 악화돼 한 달 뒤인 6월3일 눈을 감았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 박노섭은 내내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처음에는 ‘장례 치르느라 힘드신가’ 생각했다. 장례를 마친 후 어깨가 결린다는 말에 정형외과 전문병원으로 모셨다. 진찰을 마친 의사는 “과를 잘못 찾아왔다”라고 말했다. 검사 결과 폐암이었다. 박노섭은 아내가 투병하는 동안 ‘네 엄마 죽으면 1년 안에 따라간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편찮으신데 숨긴 거 같아요. 엄마부터 살리자고, 그것만 생각하자고 매번 말하셨어요.” 박노섭은 명숙의 새 차 뒷자리에서 병원을 오가며 혼잣말을 하곤 했다. “내가 당신(엄마) 몫까지 새 차 실컷 타고 간다.”

박노섭이 황임순을 묻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지하수를 상수도로 바꾼 일이었다. 대여섯 발자국 남짓한 땅을 파서 상수도관을 묻는 데 100만원이었다. 2013년 상수도 통계에 따르면 장점마을이 속해 있는 함라면의 상수도 보급율은 16.9%에 불과했다. 그만큼 지하수 이용률이 높았다. 2008년부터 마을에 상수도가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설치비용 일부를 주민이 부담해야 해서 대부분은 지하수를 이용했다.

장점마을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면서 익산시는 상수도 교체 비용을 전액 지원해줬지만, 박노섭은 이미 들인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박노섭은 금강농산이 배출한 폐수 때문에 황임순이 병에 걸렸다고 확신했다. 금강농산은 2010년 9월까지 대기배출시설이나 폐수배출시설을 따로 갖추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박노섭의 장기는 정신보다 먼저 무너졌다. 식사하는 와중에도 소변 조절을 못해 받아내야 했다. 박명숙은 아버지를 씻기면서 매일 울었다. “작은딸이랑 아버지 팔을 하나씩 나눠 드는데 이 양반이 양쪽에서 들어도 꼼짝을 안 해.” 생은 무겁고, 생을 포기하는 마음 역시 무거웠다.

병구완을 하는 동안 가출을 감행했던 중학교 2학년 때 생각이 자주 났다. 5남매 중 둘째 딸은 깍두기 같은 존재였다. 언니 옷을 물려받아 입으며 막내 여동생이 새옷 지어 입는 걸 부러워하기만 했다. 어쩐지 집안의 궂은 일도 박명숙의 몫이었다. “자식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섯이나 있는데 일을 그렇게 나만 시키더라고. 일이 너무 지겨워서 중2 때 수업료 준 거 들고 서울로 가출했어. 큰집에 일주일쯤 가 있었어요. 엄마랑 아버지가 데리러 왔길래 내가 그랬어. ‘공부를 시켜야지 일을 시킨다’고 울었어. 아버지가 그래. ‘명숙아, 일 이제 안 시킬게 가자’고. 그 약속을 결국 못 지켰지(웃음).”

결혼해 딸 둘을 키우는 동안 유년의 기억은 불쑥불쑥 치고 올라왔다. 어느 날에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밑도 끝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나만 일을 많이 시켜서, 내가 어려서부터 일만 많이 해서 되는 일이 없다고 양껏 화풀이를 했다. 그러고는 잊었다. 엄마는 기억하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 황임순은 박명숙에게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그 말을 더는 할 수 없을만큼 많이 하고 갔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박명숙은 이제 그 말을 붙잡고 산다. “진짜 아들밖에 몰랐던 양반들이거든. 딸은 필요 없다고 그랬어. 그런데 편찮으시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딸이 필요하더라는 거야.”

부모가 없는 집은 박명숙이 지킨다. 부모 영정사진을 안방에서 가장 잘 보이는 텔레비전 위에 걸었다. 사진을 보며 때로 혼잣말도 한다. “텔레비전 보면서도 한 번씩 쳐다볼 수 있어서 좋더라고. 내가 나고 자란 집이니까. 사진을 보고 있으면 엄마가 이맘때 무슨 일을 했지, 내가 뭣 때문에 혼났지,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어. ‘거기서는 편하시냐. 농사 안 짓고 사니까 재밌냐’라고 묻기도 하고.”

못 배운 시골 사람이라 그런가.
우리 얘기는 아무도 안 들어주는갑다, 했지.

2013년은 여러모로 잔인한 해였다. 손창영(당시 75세)을 시작으로 줄줄이 사망자가 나왔다. 정경례(77)는 남편 손창영이 숨진 날짜와 요일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한다. “2013년 3월25일이 월요일이었어.” 경로당에서 라면 끓여 먹고 멀쩡하게 걸어서 병원에 간 손창영은 다시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다. 익산병원에 입원한 지 보름 만이었다. ‘대학병원으로 전원시키라’는 결정을 받았다. 정경례와 큰딸은 원무과로 병원비를 치르러 내려갔다. “그 짧은 새 아들한테 전화가 왔어. 어머니, 빨리 병실에 올라오라고. 올라갔더니 남편이 위아래로 구멍마다 피를 흘리면서 고함을 치고 있는 거야. 내가 의사 멱통(멱살)을 잡고 흔들었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느닷없는 죽음이었다. 입원 기간이 짧고 내내 상태가 좋지 않아 병명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쇼크다발성 장기부전, 그리고 피부 관련 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받았다.

“우리 집이 그때 화목보일러를 땠어. 공장 올라가는 언덕에 아카시나무가 많거든. 남편이랑 나무 주우러 올라가는데 큰 츄럭(트럭)이 줄줄이 공장으로 올라가데. 나중에 보니까 그 트럭에 태우면 안 되는 ‘나쁜 거’를 잔뜩 실었는가 싶지.”

정경례의 집은 마을 첫 집이다. 언덕 위 공장에서 태우며 생기는 ‘나쁜 거’는 악취와 매연의 모습으로 나타나 바닥까지 낮게 내려앉곤 했다. 손창영을 보낸 후 정경례는 공장 앞에서, 익산시청에서 눕고 뒹굴었다. 연이은 부고에 인근 마을 주민까지 300여 명이 금강농산 앞 좁은 길을 막고 집회를 열었다. 천막도 쳐봤다. 소용없었다. “못 배운 시골 사람이라 그런가. 우리 얘기는 아무도 안 들어주는갑다, 했지.”

배움은 국민학교(초등학교) 문턱에서 멈췄다. 1학년 1학기를 다니며 ‘가나다’를 겨우 뗄 무렵 부모가 등교를 막았다. 아래로 남동생이 다섯이었다. 해수 기침 때문에 바깥 거동을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는 어머니를 돕는 건 첫딸인 정경례의 몫이었다. “지금 같으면 두들겨 맞아가면서도 학교 가겠다고 싸웠을 것인데.” 일찍 부모를 여읜 손창영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손창영은 예초기며 트랙터며 못 고치는 농기계가 없었다. 손재주가 좋기로 소문이 나 먼 마을에서도 고장 난 기계를 들고 정경례의 집으로 왔다. “그짝으로 공부를 더 했으면 우리 아저씨는 참 좋았을 것인데.” 정경례가 다시 한 번 말을 줄였다.

그해 6월10일, 김형구(54)는 부모를 동시에 잃었다. 함열장례식장이 문을 열고 3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김형구는 원두커피가 담긴 잔을 한참 내려다봤다. “꼭 이랬어.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 색깔이.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코가 뻥 뚫린다고 해야 하나. 부모님 묻고 공장 올라가서 얼마나 싸웠나 몰라. 내가 쌍욕을 아주 잘하거든. 좀 해도 될랑가(웃음). 이 X같은 새끼들아, 니들이라고 괜찮을 거 같냐!”

암 확진을 먼저 받은 건 어머니 박원례였다. 2008년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 김수정은 5년 뒤인 2013년 간암과 담낭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손쓸 방법이 없었다. 6월10일 새벽, 어머니를 모신 요양원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위독하시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를 간병하는 형제 한 명을 제외하고 온 가족이 임종을 지키러 갔다. 아침 일찍 숨을 거둔 어머니를 함열장례식장에 모시는 사이 또 다른 부고를 들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그때부터 내 목표는 하나였어. 저 공장 무조건 문 닫게 만든다. 이를 악물었지. 저걸 없애야 우리가 산다. 애들도 살고, 새로 이사 오는 사람도 산다.”

김형구의 집은 장점마을에서 가장 북적이는 집이다. 3대가 함께 산다. 김형구와 아내 배유경(52), 그리고 5년 전 식을 올리기도 전에 ‘혼수’를 준비해온 큰아들 민진(30)과 며느리 정지영(24)이 낳은 손주 윤후(5)와 시후(4)가 있다. 김형구와 배유경의 둘째 아들 민석(28)은 회사가 있는 군산에서 자취한다. 2007년 김형구가 ‘늦둥이’로 얻은 셋째 아들 민영(13)은 윤후, 시후와 함께 자랐다. 딸을 낳고 싶었는데 또 아들이었다. 민영은 그런 부모의 바람을 잘 아는 아이였다. 곰살궂고 다정했다.

김형구도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난 적이 있다. 서울 생활은 낯설고 고되고 짧았다. 1989년부터 서울 을지로 인쇄공장에서 제판실 ‘고바리’ 일을 했다. 포토숍이 없던 당시 사진을 수작업으로 고치는 일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공장이 망했다. 김형구는 미련 없이 짐을 쌌다. “고향 내려오니까 숨통이 트이더라고. 서울이 어찌나 답답했던지. 내가 뼈를 묻을 데는 여기밖에 없다 했지.”

가끔 그 결정을 후회한다. 금강농산은 부모의 목숨만 앗아가지 않았다. 두 아들 민진과 민석의 피부도 망가뜨렸다. 둘째 민석은 아직까지도 피부과에 다닌다. 여름에도 반팔과 반바지를 입지 못한다. 큰 아들 민진은 반팔을 포기하지 않았다. 흉터가 남은 피부를 문신으로 덮었다. 어깨부터 왼쪽 팔까지, 커다란 잉어를 그려 넣었다.

이 마을에서 난 거 아니니까
안심하고 드세요.

정지영은 그런 민진을 무서워하지 않은 한 사람이었다. 지영은 함라면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가족을 돕던 중 민진을 만났다. 식당에 밥 먹으러 우르르 들어온 ‘남자 떼’ 중 한 명이 민진이었다. 무리 중 한 명이 지영에게 농을 걸었다. “민진이가 너 관심 있대.” 민진은 “시끄러워, 조용히 해”라고 답하며 밥그릇에 얼굴을 묻었다. 오기가 생겼다. 지영은 그날 밤 집에 가서 페이스북으로 김민진을 검색했다. 먼저 쪽지를 보냈다. 3개월 연애했다. 첫째 윤후가 그때 생겼다. 집을 마련할 돈을 벌 때까지 시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포도즙을 컵에 따라 내오며 지영이 덧붙였다. “이 마을에서 난 거 아니니까 안심하고 드세요.” 지영이 이 마을에서 난 식재료를 안 먹는 건 아니었다. 마트는커녕 구멍가게 하나 없는 마을에서 배추나 파, 마늘은 어디에나 흔했고 다른 곳보다 품질이 좋았다. 아직 어린 윤후와 시후에게는 ‘먹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흙에서 바로 뽑아낸 것들은 어찌나 싱싱한지 자꾸만 마음을 뺏기곤 했다.

사춘기를 통과 중인 민영은 맞벌이로 바쁜 아빠(김형구)와 엄마(배유경)보다 형수인 정지영을 따랐다. 정지영은 민영의 학교 행사에 부모보다 더 자주 참석했다. 스물 넷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어린’ 시동생 뒷바라지를 도맡고, 3대가 복작거리는 집이 지영에게는 벅차지만 ‘사는 것’처럼 느끼곤 한다. 지영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었다. 함께 타고 가던 차가 큰 사고를 당했다. 지영이 혼수상태에서 한 달 만에 깨어났을 때 엄마는 이미 장례를 치른 뒤였다.

지영처럼 장점마을 외부에 접촉이 많은 젊은 사람들은 마을 밖을 잘 나서지 않는 노인들과는 다른 차원의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중학교에 다니는 민영도 마찬가지다. ‘장점마을에서 집단 암이 발병했다는 데 (너희 집은) 괜찮니?’ 같은 질문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선생님 한 명이 시작한 질문이 전교생 65명뿐인 작은 학교 전체가 던지는 질문이 되어 민영에게 꽂히기도 한다. 지영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여기에서 버스를 타잖아요? 기사님이 물어봐요. ‘여기 암 마을인데 사는 거 괜찮으냐’라고요. 그런 질문은 아무리 반복 돼도 익숙해지지 않아요.”

내가 장점부락 주민인디,
생체실험은 내가 혔다.

죽은 영감 이야기는 마을 할매들의 단골 대화 소재다. 김성숙(75)은 전날 꿈에서 본 죽은 영감 이야기를 꺼냈다. “웬 신사 멋쟁이가 오더니 내 손을 딱 잡는 거야. 영감이더라고. 손잡고 한참을 걸었당께. 죽은 사람은 꿈에서 말이 없다고 하더니 딱 그짝이여. 얼마나 서운한지.”

열일곱 살에 만난 ‘옆 동네 오빠’ 양선근은 살림에 전혀 보탬이 안 되는 남자였다. 김성숙은 부모 말을 듣지 않은 걸 자주 후회했다. 아버지는 딸이 양선근과 연애를 못하게 하려고 군산으로, 서울로 빼돌렸다. “그때는 나도 눈이 뒤집혀서(웃음). 못 하게 하면 더 하고 싶잖아. 그리고 참 잘생겼어. 키도 크고 예뻤어.” 허우대 멀쩡한 남편은 알고 보니 ‘방거칭이’였다. 백수란 의미다. 지게 지는 일 한번 하고 돌아오면 그다음 날은 방구석 네 모퉁이를 기어다니면서 죽는다고 앓았다. “일을 안 해. 어떻게 살았는가 몰라. 솥에 작대기 넣고 저을래야 저을 것도 없어.”

김성숙은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화장품을 떼서 팔다가 벽돌공장에 나갔고 식당에서 설거지도 했다. 부업으로 익산 ‘태창’ 공장에서 팬티 실밥 따는 일도 했다. 머슴처럼 사는 게 억울했다. 1988년 당시 돈으로 3만5000원 주고 춤을 배우러 다녔다. “내가 춤을 겁나게 잘 췄어. 20m 홀이 여기서부터 쩌그까지 춤 추면서 가면 여기저기서 나 데려갈라고 잡아댕겨. 참말로 옷이 찢어졌다니께.” 김성숙의 춤바람과 함께 ‘술고래’였던 남편의 의처증도 깊어갔다. “볶아 먹고 때리는” 통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양선근은 2019년 9월 치매를 앓다 숨졌다. 공장이 들어온 이래 시작된 양선근의 기침은 죽기 직전까지 멈추지 않았다. 역학조사 보고서는 장점마을 주민들의 치매와 인지기능 저하가 대조 지역 주민보다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많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연구팀은 금강농산이 담배 폐기물인 연초박을 불법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밝혀진 발암물질 외에도 확인되지 않은 담배 내 각종 발암물질이 추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적었다.

역학조사는 지지부진했다. 몇 번이나 미뤄진 역학조사 중간발표는 2018년 7월19일 익산시청에서 열렸다. 그날 김성숙은 ‘뚜렷한 증거가 없다’라고 얼버무리는 연구팀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장점부락 주민인디, 생체실험은 내가 혔다. 내가 증인이라고 소리쳤지. 답답해 죽겠는데 말이라도 하니까 속이 시원하더라고.” 김성숙도 치매 약과 위궤양 약을 장복 중이다. 출입문에는 딸이 손글씨로 크게 적어둔 종이가 붙어 있다. ‘밥 드시고 바로 약 드세요.’

“이 마을에 ‘방거칭이’가 어디 한 둘이었간. 한 마디로 백수가 널린겨. 농사꾼이 농사는 안 짓고 만날 술을 처먹어 쌌는 거지.” 죽은 남편 이야기를 하다 말고 김양녀(80)가 호탕하게 웃었다. 김양녀의 남편은 금강농산과 상관없이 많이 마신 술 때문에 20여 년 전 숨졌다. 술 좀 끊게 해보려고 병원에 데려가 입원도 시켜봤지만 소용없었다. 병원복을 입고도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음주 메이트’는 주로 이정수(73)였다. 이정수는 어디 있는지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목청이 때까우(거위) 같이 크다니께. 이 동네 어디 있어도 이정수는 찾아.”

이정수는 큰 목청 탓에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를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2018년 8월 전립선암을 진단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 배가 다 호르몬주사 때문이여. 웬만하면 수술 안 허고 약으로 치료한다고 하는디, 그거만 맞으면 아무리 운동을 해싸도 배가 안 꺼져.” 몸의 이상을 처음 느꼈던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경로당에서 윷을 놀고 술을 마셨다. 소변이 통 나오질 않았다. 이틀 뒤 검사 결과를 받았는데 큰 병원으로 빨리 가보라고 했다.

아내 최영자(65)에게 말하면 말 안 듣고 술 먹어서 생긴 병이라고 할까봐 입을 닫았다. 거실 탁자 위에 슬쩍 올려둔 병원 서류를 본 건 전주에 사는 큰아들이었다. “아버지, 이게 뭐요?” 병의 원인을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늙음의 결과라고, 막 살아서 받는 벌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다만 이정수 역시 늦게 설치한 상수도가 마음에 걸렸다. 별 생각없이 기름띠가 뜨는 지하수를 벌컥벌컥 마셨던 게 내내 찜찜했다.

최영자는 남편 이정수가 아픈 건 안타깝지만, 술을 ‘똑’ 끊어서 그건 좋다. 먹고 사는 모든 일은 마트가 아닌 땅에서부터 왔다. 이정수가 ‘고향으로 내려가자’라고 했을 때, ‘거기 내려가면 먹을 거라도 많으니까’라는 이정수의 말을 믿었다. 농사가 가진 노동의 무게를 그때는 몰랐다. 최영자와 이정수는 1979년 인천의 한 석재공장에서 만났다. 공장 동료가 다리를 놨다. 서울에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시아버지가 몸이 아프면서 아예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내려왔다. 설상가상 시부모 모두 중풍을 맞았다. “내 청춘을 거기 다 바쳐버렸지.”

‘삐약이’ 같은 아들 둘과 시부모를 집에 두고 아침 7시면 군산 합판공장으로 향하는 통근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농사만으로는 여섯 식구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오전 8시에 시작한 일은 밤 8시나 돼야 끝났다. 일요일은 유일하게 공장이 시는 날이었지만 최영자는 쉬지 못했다. “지금 사람들은 말해도 못 믿지. 아궁이에 불 때서 물 데워 시부모 씻기고, 애기들 씻기고, 손으로 빨래하고. 그러고도 살았어. 머리로는 만날 보따리 쌌지(웃음).”

배움이 짧아 생긴 아쉬움은 한평생이다. 결혼 전 인천에서 일하던 시절, 집으로 가는 대신 야학으로 향했다. 새롭게 알아가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 지 일하다 다쳤는데도 지팡이를 짚고 야학 교실이 있던 2층을 아픈 줄 모르고 올랐다. 40년 전 ‘스승’이 한 말을 최영자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보고 성실하대. 뭘 해도 하겠다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에 도전했다가 세 번을 미끄러졌다. ‘나는 안 되나봐’라는 좌절이 밀려올 때면 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몇 년 전부터 장애인 활동보조 일을 하고 있다. ‘중풍 든 시부모를 20년 모시고도 몸이 불편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느냐’는 아들의 걱정에 최영자는 웃었다. “앉아 있으면 돈이 나오나. 움직여야 돈이 나오지.” 때마침 큰며느리에게 전화가 왔다. 영상통화 받는 법은 매번 배워도 매번 헷갈린다. 최영자는 두 번 만에야 영상통화를 연결했다. 화면 속 며느리가 곧 돌이 되는 아이에게 “할머니한테 새로 배운 거 해보자. ‘주세요’ 해봐”라고 말했다. 최영자가 웃었다. “‘주세요’ 하지마. 할머니 줄 거 없어.”

아무도 안 알아줘도 큰 일이야.
밥 해먹이니까 싸우는 거지.

‘물을 못 쓰게 됐다’라는 말을 증명하듯 집집마다 정수기와 공기청정기가 흔했다. 오래된 낡은 집마다 새로 들인 가전제품만이 낯설게 반짝였다. 박순옥(71)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남편 문창섭(당시 61세)은 2004년 간암으로 숨졌다. 발병한지 1년 만이었다. 이미 온몸에 퍼진 암은 수술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거실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은 문창섭이 죽기 일주일 전 부랴부랴 찍었다. 간병하느라 머리도, 화장도 못한 박순옥의 얼굴이 젊었다. 얼마 전 묵은 짐을 정리하다 박순옥은 울었다. “영감이랑 둘이 찍은 사진이 가족사진 찍던 날 찍은 것밖에 없더라고. 애들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바빠서 그랬지. 고생 끝났다, 이제 좀 재밌을랑가 싶으니까 영감이 가버렸어.” 박순옥은 완주 고산에서 스무살에 시집왔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혼자 된 어머니가 사위라도 일찍 보자고 서둘렀다.

금강농산이 가동되는 동안 박순옥이 가꾸던 고추밭도 몇 번이나 싹 죽어버렸다. 부아가 났다. 까맣게 말라 버린 고추를 볼 때면 남편도 그 때문일까 생각하다가, 그냥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다가, 또 그 때문일까 생각했다. 금강농산 올라가는 길 입구에 대책위가 천막을 쳤을 때, 박순옥도 몇 번이나 지키러 올라갔다. ‘투쟁’은 농사일 같았다. 사람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았다. 가까이는 익산으로, 멀리는 서울로 몇 번이나 가는 동안 박순옥은 자신이 한 중요한 역할을 잊지 않았다.

토론회다, 집회다 해서 서울로 향하는 투쟁 버스는 경로당 앞에서 오전 6시면 출발하곤 했다. “싸우는 거야 똑똑한 양반들이 싸웠다고 한다만, 서울을 몇 번을 가고 또 가도 우리가 다 쌀 찌고, 닭 잡아 삶고, 반찬해서 먹을 거 해다 날랐다고. 그거 없었으면 어떻게 싸웠겠어. 아무도 안 알아줘도 큰 일이야. 밥 해먹이니까 싸우는 거지.”

누구도 기록하지 않아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박순옥은 알았다. 사람들은 ‘밥심’으로 싸운다는 걸. 그리고 박순옥을 비롯한 장점마을 할매들이 묵묵히 밥을 날랐다는 걸. 장점마을의 긴 투쟁에서 이들이 했던 수 십 명을 먹인 수 십 끼의 밥이야말로 투쟁 그 자체였다.

이갑찬이 모진 사람은 아니었어.
자기들도 이렇게 될 줄 몰랐을 거야.

많은 자식들이 부모의 수고 덕분에 집을 떠났다. 수십년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미래의 얼굴’이었다. 문봉학(79)은 파리채 여러 개를 고무줄로 묶어둔 더미에서 하나를 빼내더니 거실 제일 중앙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에서 한명 한 명을 가리켰다. ‘잘된’ 자식을 파리채 끝으로 하나하나 짚을 때 그의 얼굴은 자부로 가득했다.

어린시절을 떠올리면 가난 때문에 배를 곯았던 생각밖에 없다. 아래로 동생 다섯이 줄줄이였다. 동네 사람 주선으로 만난 최정녀(74)와 함께 집을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분가하겠다’라는 신혼부부의 말에 아버지는 쌀 한톨도 보태줄 수 없다고 노발대발했다. 문봉학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쌀을 팔러 나갈 때마다 한두 말씩 쌀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허름한 집이나마 한 채 마련할 만큼까지 ‘훔쳤다.’ 장점마을로 이사 온 건 1970년대였다. 농사만으로 살림살이가 늘어나지 않아 막노동을 다녔다. 원광대병원은 문봉학이 지은 건물 중 가장 번듯한 곳이다. 이제는 아버지가 지은 건물에서 큰딸이 일하고 있다.

화장지로 코를 막고 자도 금강농산에서부터 흘러온 냄새는 막아지지 않았다. 습관처럼 코를 풀었다. 냄새가 좀 떨어질까 싶어서였다. “귀가 먹었는가 싶어. 코를 하도 풀어가지고. 송장 썩는 냄새가 그럴란가. 진짜 냄새가 그럴 수는 없거든.” 문봉학은 갑상선암을, 아내 최정녀는 금강농산에서 4년을 일하고 피부암을 얻었다. 기침이 잦고 힘들어하는 최정녀에게 문봉학은 일을 그만두라고 만류했다. “그럼 애들은 무슨 돈으로 가르치느냐”라고 답했다.

농사로 메워지지 않는 생활을 최정녀는 가욋일로 메꿨다. 금강농산 이갑찬 대표는 주민 중 몇몇을 채용하는 ‘아량’을 베풀기도 했다. 그 중 한 명이 최정녀다. 마을에 비료공장이 들어선다고 했을 때 일부에서 반긴 것도 이유가 있었다. 농사짓는 일 말고는 일자리가 없다고 해도 무방한 농촌에서 공장은 드문 직업 선택지였다. 학령기 자녀를 키우는 젊은 농민일수록 농사와 공장 일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근 군산농공단지로 나가는 것보다는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가까운 공장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농업은 하늘의 뜻을 살펴야 했지만, 공장 일은 사장의 뜻만 살피면 되었다.

최정녀 역시 여러 공장을 전전했지만 금강농산이 마을과 가깝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오고 가는 시간만 줄여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비료를 만들다길래 뭘 하나 싶어서 올라가봤지. 이갑찬이가 ‘여기 사냐’고 묻더라고. 안 그래도 여자 하나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날로 다녔지.” 비료 원료를 버무리는 일을 했다. 원료 포대가 쏟아지지 않게 잘 자르는 게 관건이었다. 쓰레기를 돈 받고 갖고 와서 비료를 만들어 파는 과정을 보고 세상에 이렇게 땅 짚고 헤엄치는 일도 있구나 생각했다. “이갑찬이가 초기에는 재산세 낼 돈도 없어서 나한테 꾸고 그랬어. 그러다 부자가 된 거야. 쓰레기로 재미를 본 거지.”

금강농산 안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자욱했다. 일을 마치고 나오면 사람 꼴이 아니었다. 건강한 몸만 믿고 돈만 보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데모하러 공장에 올라오면 커피를 내다주곤 했다. 하루는 이갑찬 대표가 사무실로 최정녀를 불렀다. “공장이 지금 마을 주민들 때문에 피해가 얼만데 왜 협조해주냐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나는 부락사는 사람인데 어떻게 모른척 하느냐고 했지.”

그때는 몸만큼 마음이 아팠다.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내가 얼마나 말랐는지 온 동네에 최정녀 죽는다고 소문이 다 났어.” 오죽하면 제 발로 정신병원을 찾아갔다. 군산개정정신병원 의사 이름이 김성수라는 것까지 지금도 기억한다. 신경성 우울증이라고 했다. 우울증 약은 지금도 먹고 있다. 2014년에는 미간에 도돌도돌 피부가 올라왔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피부암이었다.

공장 때문에 암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일었지만 그래도 최정녀는 이갑찬을 ‘좋은 사람’으로 기억했다. 이갑찬 대표의 아들로 2016년부터 공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운영한 아들 이수영도 착했다고 덧붙였다. “자기들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거야. 모진 사람은 아니었어. 김제에서 하다 왔는데 그때는 원료를 만들어서 풍농(군산 공장)에 갔다 줬다더라고. 여기 와서 돈을 좀 벌다 보니까 기계도 싹 바꾸고 그러면 더 벌고 싶잖아. 그걸 시랑 도에서 관리를 잘했어야지.”

공장에서 나온 물 때문에 물고기가 떼죽음 당했는데
그걸 백로가 먹어도 되겠는가.

장점마을 주민들이 익산시에 넣는 민원은 번번이 무시됐다. 민원을 넣으면 공무원은 ‘아무 때나 전화하지 말라’고 으름 놓기 일쑤였고, 시의원은 ‘아이고 이렇게 냄새가 나서 어떻게 사십니까’하고 떠나면 답이 없었다. “말이나 하지 말지. 아이고 나는 그동안 하도 말을 해서 싫증나.” 마을 이장 김인수(70)는 1992년 축사를 하기 위해 현재 터에 집을 지었다. 농업용수로 쓰는 소류지와 금강농산 사이에 위치했다.

2016년 소류지에서 물고기 집단 폐사가 일어났다. 2010년에 이어 두 번째였다. 허연 배를 까고 둥둥 떠오른 물고기떼를 처음 본 이도 김인수였다. 소류지 물은 마치 하얀색으로 보였다. 물가에는 백로가 죽은 물고기를 먹겠다고 진을 치고 있었다. 첫 번째 떼죽음을 목격했을 때 김인수는 동물보호단체에 전화를 걸었다. “공장에서 흘려보낸 오염된 물 때문에 죽은 물고기를 백로가 먹어도 되겠는가, 걱정이 되더라고. 그래서 동물보호단체에 전화를 했지. ‘뭐 어쩔 수 없다’라고 그러데.”

악취와 매연은 공장 바로 아래 위치한 김인수의 집에서는 ‘직격탄’이었다. 2010년 추석 명절을 앞두고 금강농산에서 뿜은 매연 탓에 아내 김순덕(68)이 구급차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온가족이 공장으로 쫓아올라갔다. 이갑찬 대표는 집을 사주겠다고 장담했다. 김순덕은 그날을 떠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말뿐이지. 늘 그런 식이었어. 우리 어매가 내 이름을 잘못 지었줬는갑지. 순하게 살라고 순덕이랬는데. 저짝(금강농산)이랑 싸우다보니까 호랭이가 됐네.” 싸우다 지쳐 집을 내놓기도 여러 번이었다. 당연히 아무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김인수는 마지막까지 금강농산에 재직했던 직원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14년을 일했다. 금강농산에서 일하게 된 건 이갑찬 대표 제안이었다. 공장 때문에 집이 피해가 많다고 하니 ‘보상’해주는 셈 치고 들어와서 일하라고 했다. 원재료를 분쇄하는 공정에 있었다. 김인수는 대책위가 세워지고 공장 내부 정보를 톡톡히 제공했다. 폐기물을 어디에 묻었는지, 문제가 된 연초박은 어디에 쌓았는지 따위 정보는 금강농산에서 오래 일한 김인수가 아니었으면 주민대책위에서는 알 수 없을 정보였다. 김인수의 축사에는 당시 금강농산에서 사용했던 연초박이 지금도 쌓여 있다. 나중을 대비해 김인수가 옮겨둔 것이다.

공장이 문을 닫았지만 두려움마저 끝난 건 아니다. “우리는 일종의 ‘보균자’여. 몸 안에 쌓인 유해물질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으니까. 요 작은 마을에서 벌써 몇 번 초상을 치렀나 몰라. 내 차례가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게 무서운 거지.” 김인수의 집에는 얼마 전 칠순잔치를 마친 흔적이 남아있었다. 세 딸이 케이크에 촛불과 함께 꽂았던 토퍼의 글씨는 다음과 같았다. ‘인생은 70부터. 아빠 사랑해요.’

금강농산에서 대각선에 위치한 장영수(57)의 축사도 피해가 만만찮았다. 2008~2012년 사이에 죽어나간 젖소가 스물다섯 마리였다. 소 한 마리가 죽을 때마다 25만원을 주고 포크레인을 불러서 묻었다. 공장에 올라가서 몇 번이나 난동을 부렸다.

“스트레스 좀 풀고 왔지. 내가 몇 번을 쫓아 올라가니까 이갑찬이 나중에는 축사로 찾아왔어. 한 번만 살려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어. 내가 당신을 살릴 게 아니라 당신이 나를 살려줘야 한다. 당신은 군산에 있는 집으로 가면 그만이고, 나도 냄새 피해서 문 꼭 닫고 집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그만이지만 우리 소들은 어떻게 할 거냐. 집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공장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야 되는 거야.”

이갑찬 대표는 장영수에게 소 면역력을 높이는 약을 200만원 어치 사서 보냈다. 매연을 줄여보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그때뿐이었다. 경찰이며 면사무소 시청을 쫓아다니며 신고를 하고 민원을 넣었지만 소용없었다. 나중에는 자포자기했다. “내가 이갑찬이한테 장점마을에 집 구해준다고 여기서 살으라고 했어. 콧등으로도 안 듣지. 지 목숨은 귀한가보다 했지. 하여간 저 위에서 별 거 다 태웠어. 간장 찌그래기도 태우고. 공기 간을 맞출라고 그랬는가(웃음).”

part 2.
여전히,
장점마을에 남은 문제들
금강농산
암 발생 가구

마치 ‘다른 그림 찾기’ 같았다. 금강농산에서 8년 동안 근무한 김재길(47)이 텅 빈 공장 내부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만 해도 여기에 기계가 남아있었는데⋯.” 공장 부지 왼편 끄트머리에 있던 식당은 헐려 있었다. 직원 스무 여명이 밥을 먹던 길쭉한 테이블도 사라졌다. 정수기도, 싱크대도 보이지 않았다. 공장 마당에 쌓여 있던 KT&G 로고가 찍힌 팰릿(화물을 쌓는 틀)도 없었다. 공장 안을 둘러보던 김재길이 유일하게 남은 설비 앞에 멈춰 섰다. “이건 사이즈가 커서 못 뜯어갔나 보네.” 2~3층 높이의 비료 사일로(저장탱크)였다.

2017년 11월 금강농산이 파산한 뒤 공장 부지는 경매를 통해 경북 영천시에 있는 ㅁ 비료 업체로 넘어갔다. 마을에 또 다른 비료 공장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장점마을 주민들이 항의하자, 익산시는 그제야 뒤늦게 ㅁ 업체로부터 도로 부지를 사들였다. ‘증거’가 될 수도 있는 공장 내부에 남아있던 자재는 ㅁ 업체가 모두 철거해 가져간 뒤였다. 취재진이 금강농산을 방문한 2월11일에도 ㅁ업체 소속 화물트럭 두 대와 봉고차 한 대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김재길은 장점마을 주민이기도 하다. 집에서 공장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지만,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 아니면 차를 타고 출퇴근했다. 야간 근무가 끝나면 피곤해서 집까지 걸어갈 힘도 없었다.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에서 김재길은 밤 근무를 맡았다. 밤 11시에 출근해 아침 8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마침 밤 근무조 동료가 퇴사하면서 빈자리가 났고, 다소 피곤하더라도 그편이 수당이 더 세게 붙어 다소 욕심을 냈다. 공장이 가동을 쉬는 날이어도 비가 오면 나가봐야 했다. 공장과 가까운 곳에 사는 탓이었다.

비오는 날 출근할 때면 빗물을 퍼내는 게 급했다. 지붕에서 샌 비로 바닥이 진흙탕이 되기 전에 양수기(물을 끌어올리는 펌프)를 돌려야했다. 공장 지붕은 자주 삭았다. 반죽된 비료 알갱이를 300℃가 넘는 고열로 건조하는 공정 때문이었다. 재료에 불길이 직접 닿는 과정 속에서 불완전 연소가 일어났다. 역학조사는 이때 1급 발암물질이 포함된 연기가 생성됐다고 결론 냈다.

연기가 굴뚝으로 빠져나가기 전 유해 성분을 걸러주는 세정 시설은 무용지물이었다. 연기를 씻어주는 물을 갈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강농산은 물을 정화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지도, 폐수를 처리할 전문업체를 부르지도 않았다. ‘장점마을 환경비상대책 민관협의회’ 위원으로 대기 오염 부분을 조사한 강공언 교수(원광보건대학교 보건의료학부)는 이미 오염물질이 가득찬 물에다 계속해서 오염물질을 넣어봤자 세척이 될 리가 없다고 설명했다. 제 기능을 못하는 세정 시설을 거친 연기는 물기까지 머금어 무거워졌다. 무거운 연기는 희석되지 않은 채 장점마을에 고였다.

공장이 운영되던 당시 이갑찬 대표는 공장과 마을 집단 암 발병 사이 인과 관계를 부정했다. ‘공장 때문에 암에 걸려 죽은 마을 사람이 있다면 공장에서도 암으로 죽은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직원 모두 건강하다’라는 논리였다. 이갑찬 전 대표가 자신했던 것처럼 모든 직원이 건강했던 건 아니다. 역학조사팀은 2002년부터 2017년까지 금강농산에서 근무했던 직원 82명의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추출했다. 이중 5명이 암에 걸린 것을 확인했다. 2004년 유방암, 2005년 위암, 2013년 대장암, 2014년 피부암, 2015년 폐암으로 각각 한 명씩 진단을 받았다. 이갑찬 대표 역시 2018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이 대표를 포함하면 밝혀진 것만 6명인 셈이다.

폐쇄 직전까지 공장을 다닌 직원 17명 중 〈시사IN〉과 연락이 닿은 10명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의 건강 상태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를 주저했다. 오경재 교수(원광대 예방의학교실)는 “‘환경재난’이라 부를 수 있는 장점마을 사태에서 정부가 놓치고 있는 부분 중 하나가 금강농산 근무 경력이 있는 노동자에 대한 추적 관리다”라고 말했다. 아무도 관심을 쏟지 않아서 오 교수가 개별적으로 노무사를 섭외 해 관련 건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역학조사 결과도 나왔겠다, 산재보험보상법이 있으니 업무관계성 인정받기도 어렵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노무사는 며칠 만에 두 손을 들었다. “이분들도 피해자이지만 분노에 차 있다. 마을 주민들이 괜히 문제를 만들어서 자기가 일자리를 잃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 교수는 농촌에 거주하는 근로자들의 상황과 심리적 맥락을 고려한 상담과 보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금은 건강하더라도 언제 발병할지 모르기 때문에 고용보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고용노동부에서라도 나서야 한다.”

2017년 3월 민관협의회 위원들과 마을주민 간담회에서 아버지 이갑찬 대표를 이어 금강농산을 책임지고 있던 이수영 사장은 장담했다. “회사가 집단 암 발병 원인일리 없으며 우리가 원인으로 밝혀진다면 책임지고 전액 보상하겠다.” 하지만 그해 4월 금강농산은 익산시로부터 폐쇄 조치를 받고 폐업 절차를 밟았다. 사과도, 보상도 없었다. 익산시는 비료관리법과 폐기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이수영 사장을 고발했고, 이 사장은 지난 2월 구속 수감됐다.

김재길은 공장의 무능보다 관리감독 부재를 지적했다. “공장에서는 그래도 서류를 다 갖춰서 보고했다. 공장이 잘못하더라도 그 서류를 꼼꼼히 들여다보며 관리하는 건 정부의 몫이지 않을까.” 장점마을 주민인 김재길은 그나마 주기적으로 건강관리를 받을 수 있지만, 나머지 동료들의 잠재적 건강 위험 요소는 고스란히 각자의 책임으로 남았다.

“이 문제는 우리가 몇 번이고 사과해야 하는 문제다.”

2019년 12월10일 정헌율 익산시장은 서울 강남구 KT&G 서울사옥 앞에 있었다. ‘익산 장점마을 집단 암 발병 사태 KT&G 책임 촉구’ 집회 앞줄을 지켰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지던 그날 집회에서 정 시장은 잠시 언급됐을 뿐이다. 장점마을 주민들이 익산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전라북도 행정부시장을 지낸 정헌율 시장은 전임 시장이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물러나며 열린 2016년 4월 재선거로 임기를 시작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정 시장이 임기를 시작할 무렵 장점마을도 주민대책위원회 구성을 논의하고 있었다. 시기가 잘 맞았다. 정 시장은 장점마을 문제를 이전 시장들처럼 외면하기 어려웠다. 2016년은 장점마을이 ‘집단 암 발병’으로 여러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지역 이슈를 넘어 전국 이슈가 되면서 익산시의 관리·감독 부실 문제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속된 민원에도 꿈쩍 않던 익산시가 악취와 폐기물 단속에 나선 것도 2016년부터였다. 2017년 4월에는 금강농산을 폐쇄 조치했다. 금강농산은 폐쇄 중지 가처분신청으로 맞섰지만 그해 11월 결국 파산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전문가는 폐쇄하기에는 애매한 위반이라고 기억했다. “니켈(중금속) 배출 기준치 위반인데, 산업단지 같은 데서 그 수치가 나왔으면 위반이 아닌 숫자였다. 그동안 더 심한 위반사항에도 폐쇄 조치를 안 했던 시가 마을 주민들이 역학조사를 청원한지 일주일 만에 결정한 일이라 우리끼리는 정치적 의도가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겉으로는 마을을 위해 공장을 폐쇄한 것처럼 보였지만, 역학조사 결과를 왜곡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이후 실제로 역학조사가 험난한 길을 걸었던 것도 공장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금강농산 폐쇄와 함께 원인 규명과 환경오염 기초 조사를 위한 공식기구인 ‘장점마을 환경비상대책 민관협의회’(민관협의회)도 2017년 4월 출범했다. 장점마을 문제 해결을 위해 관과 민간 전문가, 주민이 처음으로 머리를 맞댔다. 김세훈 민간위원(전북대학교 환경공학박사)은 무엇보다 거버넌스가 작동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성취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멱살부터 잡고 욕설과 고소고발이 오가다 흐지부지되기 십상이다. 민관협의회는 달랐다. 양측 모두 요구사항을 조정하면서 테이블을 유지했다. 30차 회의까지 열렸는데, 앞으로 남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만큼 회의가 더 필요할 거다.”

정헌율 시장은 3월6일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행정의 총체적 부실을 인정했다. “내가 오기 전의 일이지만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장점마을 주민들이 준비 중인 소송도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겠다. 이 문제는 우리가 몇 번이고 사과해야 하는 문제다. 환경부와 전라북도, 익산시 행정이 미흡하게 대처했고 무책임했다.”

하지만 책임자 처벌은 쉽지 않아 보인다. 지방공무원법에 의한 일반 업무의 징계시효가 3년이기 때문이다. 정 시장은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부실이나 불법에 관여했던 공무원들은 이미 다 떠난 상태다. 남아 있다 하더라도 징계시효가 지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결과가 나와봐야겠지만 감사원이 두 차례나 감사를 하고도 결과를 아직 못 내리는 것도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대도시와 수도권에서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악취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폐기물 처리업과 같은 영세 사업장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지방에 모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익산도 예외는 아니다. 2019년 11월 익산은 환경친화도시를 선포했다. 조직개편도 단행됐다. 환경안전국을 신설하고 환경직 공무원도 현재 42명에서 2022년까지 62명으로 증원할 계획이다. 올해 3월에는 기초자치단체 최초로 환경특별사법경찰관을 도입해 현재 3명이 활동 중이다. 특별사법경찰관은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분야의 공무원에게 수사권을 주는 제도다. 익산시 역시 지역 이미지 실추라는 ‘보이지 않는 손실’을 메꾸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장점마을이 환경문제 해결의 ‘선례’를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있다.

불행의 매 순간 이익을 거뒀다

임형택 익산시의원 지역구(영등2동·삼성동·부송동)는 산업단지 옆에 붙어있는 아파트 단지가 많아 악취 민원이 빈번했다.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악취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임 의원은 2013년 ‘익산악취해결시민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2017년 장점마을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슈가 될 무렵 임 의원은 여러 차례 마을과 금강농산을 찾아갔다. 그의 지역구는 아니었지만 익산 지역 내 환경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민관협의회 위원들이 각자 분야에서 문제 원인을 찾는 동안 그는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자료를 모았다. 수백 장에 달하는 서류 더미 속에서 17년 동안 장점마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한 줄 한 줄 서류에 밑줄을 그어가던 임 의원의 눈에 들어온 이름이 있었다. ‘풍농’이었다. 풍농은 업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비료 제조업체다. 국내를 넘어 일본과 동남아시아에 비료를 수출하기도 한다. 비료 공장과 연구실뿐만 아니라 화물 운송업체와 골프장도 운영하고 있고, 장학재단도 가지고 있다.

2009년 6월1일 풍농은 금강농산과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임대 계약서에 등장하는 ‘갑’은 뜻밖에도 금강농산이다. 전북 익산시 함라면 산기슭에 위치한 영세업체가 ‘비료계 대기업’ 풍농에게 생산 공장을 빌려준 것이다. ‘을’이 된 풍농이 금강농산으로부터 빌린 시설은 건조기, 열풍기, 냉각기 등 유기질비료 생산과 관련된 설비다. ‘퇴비 제조시설’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특별히 따로 명시돼 있다. 즉 유기질비료 생산 라인은 풍농이 빌려 담당하고, 연초박이 들어가는 퇴비 생산 라인은 기존대로 금강농산이 운영한다는 의미다.

퇴비를 만들 수 있는 재료와 유기질비료를 만들 수 있는 재료는 다르다. 퇴비는 발효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수분이 많고, 영양분 요소에 대한 규정이 거의 없다. 반면 유기질비료는 발효 과정이 없기 때문에 수분이 적고, 모든 제품 성분이 최소한의 공정 규격에 맞춰져 있다. 당연히 유기질비료가 퇴비보다 더 비싸다.

비료관리법 행정규칙에 따르면 ‘담배 제조업에서 발생하는 동식물성 잔재물’로는 퇴비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금강농산은 2009년 풍농과의 계약 이전부터 연초박을 썩혀서 퇴비를 만드는 대신 300도가 넘는 고열에 건조시켜 유기질비료를 제조했다. 전국 어느 비료 업체에서도 쓰지 않는 기상천외한 공정이었다. 이 불법적인 생산 과정에서 국제암연구소가 지정한 제1군 발암물질이 발생했다. 연기는 굴뚝을 통해 가까운 장점마을로 퍼졌고, 이는 장점마을 주민들이 각종 암을 겪게 된 원인이 됐다.

2009년 6월1일 임대 계약을 맺은 풍농은 나흘 뒤 익산시에 제조 공정 시설을 확장하겠다는 신고서를 제출했다. 열흘 뒤 익산시는 풍농에 설치를 허가하는 문서를 발급해줬다. 금강농산은 풍농의 후광을 등에 업고 수월하게 공장 규모를 키울 수 있었다.

시의 허가가 나온 지 약 한 달 만인 7월20일 두 회사는 임대 계약을 해지하고, 위탁생산(OEM) 관계로 전환했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금강농산은 대규모로 유기질비료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을 얻었고, 풍농은 직접적인 운영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유기질비료를 공급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후 금강농산은 풍농이 운영하던 임대 시설을 직접 가동하며 풍농에 비료를 납품했다. 두 업체 간 임대 계약이 ‘치고 빠지기’ 전략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풍농 관계자는 “당시 계약을 맺었던 대표가 사망했기 때문에 왜 계약이 2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해지됐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계약과 관련된 직원은 모두 퇴사한 상태다”라고 말했다.

금강농산에서 근무했던 한 직원은 “우리가 비료를 만들면 군산에 있는 풍농 장항공장에서 큰 화물트럭이 와 싣고 갔다”라고 말했다. 풍농 관계자는 “금강농산에 위탁생산을 준 건 맞지만 다른 업체도 위탁을 많이 줬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금강농산에서 만들어진 비료가 농촌진흥청의 안전검사를 모두 통과했다. 검사에서 연초박을 감지하지 못한 건 당연하다. 연초박이 들어간 걸 감지하려면 니코틴 검사를 해야 하는데, 애초에 유기질비료엔 연초박을 넣으면 안 되기 때문에 니코틴 검사를 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도 최근에 금강농산 문제가 불거지며 연초박 사용에 대해 알게 됐다. 우리도 피해자다.”

금강농산을 통해 수 년 간 이익을 벌어들인 업체는 풍농만이 아니다. KT&G는 금강농산에 연초박을 팔았다. 담배를 만들고 난 뒤 남은 연초박은 비료 업체의 원료가 됐다. 폐기물 처리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환경부 ‘올바로’ 시스템이 도입된 2009년부터 2018년까지 KT&G가 전국 12개 비료업체에 판매한 연초박은 약 5369t(톤)에 달한다. 이중 약 42%를 차지하는 2242t이 장점마을에 위치한 금강농산으로 갔다.

올바로 시스템 기록이 시작된 2009년 이전에도 금강농산은 연초박을 사용하고 있었다. 2006년 전라북도 비료 등록 서류에도 연초박이 등장한다. 퇴비를 만드는 데 쓰이는 연료 중 20%가 연초박이라는 내용이었다. 다만 연초박의 출차는 기록돼 있지 않다. 즉 KT&G에서 배출된 연초박임을 확인할 수 있는 2242t은 올바로 시스템이 시작된 2009년부터 누적된 최소량일 뿐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수 있다.

KT&G로부터 연초박을 사들인 12개 업체 중 금강농산을 제외한 11개 업체는 모두 연초박을 부숙(썩힘)시켜 ‘퇴비’를 만들었지만, 금강농산은 연초박을 연소(태움)시켜 ‘유기질비료’를 만들었다. KT&G 홍보팀 관계자는 “우리는 법적인 기준(퇴비 시설)을 갖춘 비료 공장에 연초박을 매각했다. 금강농산을 관리 감독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금강농산이 서류상으로는 연초박으로 퇴비를 만들 수 있는 시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믿고 판매했고 그 이후의 처리 과정은 금강농산의 몫이라는 뜻이다. 실제 금강농산은 ‘퇴비화 시설’을 신고한 상태였고, 공장 설계도에도 퇴비 생산 라인을 표시해 놓았다.

현실에서 퇴비 생산 설비는 가동되지 않았다. 임형택 익산시의원은 “수차례 공장을 방문했지만 공장 내부에 퇴비 시설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금강농산이 문을 닫기 전까지 8년 동안 공장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공장에서 퇴비를 만든 적 없었다”라고 말했다.

2009년 6월 체결된 금강농산과 풍농 간 계약서를 보더라도 금강농산이 퇴비를 제조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임차 항목을 세세하게 적어놓은 임차 명세표에 따르면, 풍농이 유기질비료 생산 시설만 빌리는 동시에 ‘생산 인원 전원’을 빌린다고도 쓰여 있다. 풍농의 유기질비료 공정에 ‘생산 인원 전원’이 투입되면, 금강농산의 퇴비 공정을 운영할 인력은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 임대차 계약서는 최소한 해당 기간에 금강농산에서는 퇴비를 생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점마을 환경비상대책 민관협의회 위원 중 한 명인 김세훈 박사(전북대 환경공학과)는 “어마어마한 담배 소송을 해본 KT&G가 연초박이 위험한 물질이라는 사실을 정말 몰랐을까. 만약 KT&G가 연초박을 자체적으로 처리하기 어려웠다면 외부업체에 돈을 주고 안전하게 폐기시켰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처리 능력도 확인되지 않은 업체에다 돈을 받고 팔았다”라고 지적했다.

법이 놓친 사각지대를 잡아내는 건 행정의 몫이다. 그러나 익산시는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임형택 의원은 “주민이 민원을 제기했을 때, 현장에 나온 공무원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서류와 현장을 대조하는 것이다. 업체에서 신고한 설비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하나하나 점검하면서 그중 어디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현장 관리 감독의 기본이다. 결국 공장이 가동되는 17년 동안 시는 기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금강농산이 문을 닫은 후에야 전라북도는 소속 시․군에 앞으로 연초박 반입을 전면 금지하라는 공문을 보내고, 이미 들어와 있는 폐기물에 대해서는 전수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또 전라북도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연초박을 재활용 할 수 없이 폐기하도록 하자는 내용을 담은 관련 법 개정안을 정부에 건의했다. 소를 잃고 17년 만에야 외양간을 고치겠다고 나선 셈이다. 그 동안 비료 원료를 제공하고, 비료를 생산하고, 생산된 비료를 전국으로 판매하는 단계마다 각 기업들은 이윤을 거뒀다.

역학조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의과대학 수업은 머리보다 체력을 요구했다. 오경재 교수(원광대 예방의학교실)는 대학 시절 자주 조는 학생이었다. 조는 중에도 또렷이 들린 말이 있었다. “‘나무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인다고 숲 자체가 건강해지지 않는다. 숲 전체를 봐야 한다. 의학도 개인이 아니라 전체가 건강해지는 법을 고민해야 하는 학문이다.’ 교수님이 그 말씀을 하는데 정신이 번쩍 나더라고요.” 그 말에 의지해 ‘인기 없는’ 예방의학을 선택했다. 3평 남짓한 진료실에 평생 앉아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근데 제가 잘 몰랐어요, 시골 출신이라. 전공의가 돈을 잘 벌더라고요(웃음).”

오경재 교수는 ‘장점마을 환경비상대책 민관협의회’ 민간위원 중 한 사람이다. 역학조사 당시 조사방향이나 연구방법 등 전반적인 내용을 검토했다. 환경부와 마을 주민, 민관협의회 위원들 사이에 역학적 관련성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을 때도 그가 묘안을 냈다. 조사 결과를 한국역학회에 넘기자며 설득했다. ‘역학적 관련성이 있다’는 결론이 나기까지 지난한 싸움의 최전선에 오 교수가 있었다.

역학조사를 전후해 여러 번 장점마을을 찾았다. 주민들 몰래 다녀가곤 했다. “저도 사람이라 감정이입이 돼요. 장점마을은 내용을 알면 알수록 북받치는 게 있어요. 객관적으로 보고 의학자로서 태도를 유지하려면 일부러라도 거리두기를 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마을 주민들에게도 더 도움이 되고요.”

처음부터 장점마을 문제에 관여한 건 아니었다. 역학조사 개시가 결정되고 난 뒤 의학적 부분을 검토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왔다.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환경문제는 인과관계를 다투기 매우 까다로운 분야다. 그럼에도 외면하기 어려웠다. 대도시에 비해 여러 자원이 부족한 지역사회에서 전문가로서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 교수는 2019년 11월 역학조사 결과 발표 이후 사그라진 언론의 관심이 걱정이라고 했다. “역학조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에요. 언론은 끝이라고 생각했는지 쏙 들어갔지만(웃음). 앞으로가 더 중요하고 후속조치가 잘 되고 있는지 감시가 필요해요.” 3월5일 오후 원광대 의과대학 연구실에서 오경재 교수를 만났다. 그는 PPT 자료까지 준비해 취재팀을 맞이했다.

환경오염 피해로 인한 비특이성 질환의 역학적 관련성을 인정한 첫 번째 사례였다.
연초박은 사실상 담배다. 담배는 발암물질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담배 만들 때 그나마 ‘좋은’ 부분을 쓴다. 부산물인 연초박은 찌꺼기여서 환경이나 인체에 유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고열을 가해서 만드는 유기질비료 공정 자체도 유해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이었다. KT&G가 담배를 생산하고 남은 부산물을 비용을 들여 폐기 처분하는 대신 돈을 받고 팔아 수익을 챙겼다. 금강농산은 법에 정해진 대로 퇴비를 만든 게 아니라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불법적으로 공정을 바꿨다. 행정기관에서는 모니터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장점마을 주민들은 사실상 ‘간접흡연’에 20년 가까이 무작위로 노출된 거다. 그것도 굴뚝을 통해 대량으로. 이건 인과관계를 규명하지 못하는 게 더 어렵다고 판단했다.
연초박이 담배만큼 위험하다면 왜 애초 법으로 금지하지 않았을까?
연초박을 단순 폐기물 취급해서 법적으로 안 걸러지는 게 문제였다. 발암물질이지만 많은 공장에서 취급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사각지대에 있었던 거다. 비료관리법에서 연초박으로 퇴비는 만들어도 된다고 돼 있는데, 제가 알고 있는 과학적 상식으로는 퇴비로 만드는 것도 안전하지 않다. 퇴비가 오히려 유해물질을 퍼뜨리는 셈이다. 퇴비로도 못 쓰도록 법을 바꿔야 한다. 농촌진흥청에서 재활용할 수 없도록 개선하기로 했다.
담배를 떠올렸을 때 생각하는 피부암이나 폐암이 아니라 다소 연관성이 부족해 보이는 암도 많이 발병했다.
그 때문에 부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이걸 이해하면 좋겠는데, 담배는 9000여 가지 유해물질과 70가지 발암물질 덩어리다. 단일 물질이 아니라 혼합물이다. 담배라는 특이성 때문에 발암물질과 암이 일대일로 성립되지 않고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상호작용에 따라 수십 가지 암이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질병을 일으키는 트리거(방아쇠)는 다 다르다.
역학조사는 2018년 12월에 마쳤는데 발표가 미뤄져 2019년 11월에야 결과가 알려졌다.
환경부에서 매우 소극적이었다. 왜 이렇게 안 되는 쪽으로만 논의를 끌고 가는가 봤더니 파급효과를 우려하더라. 전국에서 환경문제를 다 들고일어날 수 있다고. 그동안에도 비특이성 질환에 대해 인정되지 않은 게 그런 이유구나 싶었다. 당사자인 마을 주민들은 반박할 만한 전문지식도 없으니까. 장점마을은 운이 좋았던 게 전문가들이 결합해 있었다. 저만 해도 예방의학 전문의로서 환경부에 계속 근거를 대고 반박했다. 그래도 안 되어서 타협을 한 게 제가 한국역학회에 전문가들이 많으니 결과를 그쪽으로 가져가보자고 제안했다. 환경역학 전문위원들이 모여서 결과를 검토해 ‘역학적 관련성이 있다’고 확인해줬다. 앞으로 다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 처지에서 생각해야 한다. 증명 책임을 비전문가인 피해자에게 미뤄서는 안 된다. 대책은 사람 중심이어야 하지 않겠나.
환경부와 견해차가 가장 컸던 부분은?
환경부에서 주장한 내용 중 하나가 ‘인정하기에는 대상자 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말할 때는 표본이 커야 한다는 거다. 건강조사나 통계조사처럼 전체를 대표할 수 있으려면 대상자 수가 커야 한다. 하지만 환자 대조군 연구는 수가 많을 필요가 없다. 이건 대상자가 적을 때 인과관계가 질적으로 훨씬 높은 연구다. 이런 질환은 발생하면 병원으로 오기 때문에 전부 추적이 가능하다. 전수가 확보된다는 의미다. 환경부 주장대로라면 환경문제는 대규모로 발생해야만 인정된다. 대도시에서만 가능하다. 대상자 수의 의미를 없애기 위해서 유해물질에 노출된 사람과 아닌 사람을 비교하는 거다. 장점마을과 비슷한 규모의 마을, 함라면, 익산시, 전라북도, 전국 이렇게 비교했을 때 (암 발생률이) 많게는 수십 배까지도 높게 나왔다. 한 마을에서 평생 같이 산 사람들이라 조건이 다 같다. 마을 주민 중 누군가 음식을 짜게 먹었을 수는 있다. 그런데 다른 마을은 안 그럴까? 비슷한데 여기만 데이터가 튀는 건 특별한 이유, 다른 지역에는 없는 요인이 있다는 거다. 또 하나가, 이건 내가 정말 분노하는 부분인데, ‘많은 사람들이 사망해서 알기 어렵다’고 했다. 건강 문제에서 가장 결정적인 정보는 사망이다. 그게 가장 강력한 증거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조사 못해서 알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그랬다. 파묘(破墓)라도 해서 부검하자고. 그런 주장은 정말 딴지를 걸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역학적 관련성이 인정됐다.
반박-재반박이 정말 치열하게 오갔다. 중간결과 발표 때 ‘개연성은 있지만 제한점이 있어서 인정은 어렵다’고 했다. 환경부는 ‘그래도 우리가 이만큼이나 받아들였어’라고 칭찬받고 싶었던 것 같은데, 최재철 주민대책위원장이 그날 한 말이 있다.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거냐?(웃음)”
익산시가 환경개선사업 일환으로 경로당 안에 진료실이 포함된 건물을 마을에 짓기로 했다.
지금은 예산도 급하게 편성돼 일단 쓰느라 바쁜데, 안정적으로 후속조치를 하려면 기금 형식으로 관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민관협의회 회의 때 건강관리 방향에 대해 더 논의할 수 있는 구성체를 만들자고 했는데 그 부분은 안 받아들여졌다. 암은 잠복기가 길기 때문에 평생 관리해야 한다. 대상자도 현재 암 환자로만 한정지어서는 안 된다. 유해물질에 오래 노출됐기 때문에 암 외에도 심혈관 질환 등 아직 안 나타난 질병까지 고려해야 한다. 마을 전체가 집단 노출된 것을 가정해 클러스터를 형성해서 관리해야 한다. 코로나19도 신천지 전수조사한 게 집단 발생했기 때문이지 않나. 일반검진은 건강보험에서 커버하고 있기 때문에 유해물질이 일으킬 수 있는 질환 위주로 집중 검진을 해야 한다. 정신건강과 심리적인 부분은 지금 손도 못 대고 있다.
금강농산 터 활용을 놓고도 여러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용역을 줘서 결론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는데. 처음 시에서 어린이 평화공원, 생태 테마공원 이런 걸 얘기해서 내가 정말 펄쩍 뛰었다.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사후관리 차원에서 조사가 시작됐지만 공장 터는 오염이 얼마나 더 심할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런 장소에 아이들이 뒹굴 수 있는 테마공원을 만든다? 아무래도 지자체는 언제든지 보여주기식 행정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임기 안에 성과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보다 더 급한 것들이 많다. 특히 농산물 문제다. 시에서 매입해 폐기하는 건 또 한번 낙인을 찍는 꼴이다. 안전한지 아닌지를 빨리 파악해주는 게 먼저다.
환경부는 앞으로 어떤 점이 바뀌어야 할까?
환경부가 지원하는 건 ‘피해구제’ 하나뿐이다. 하나마나다. 생색내기지. 인정해주는 것도 그동안 들어가는 진료비 정도다. 그건 보상이 아니다. 결국 예산이 중요하다. 환경부도 기획재정부를 설득해 정부 차원에서 환경문제와 관련해 쓸 수 있는 예산을 확보해두어야 한다. 또 환경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 환경역학도 정말 열악하다. 환경부 안에서 전담하는 전문가도, 부서도 없다. 역학조사도 외부에 발주하면 관련 전공자들 모아서 하는 거다. 연속성·지속성·전문성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면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소통도 안 된다. 환경문제가 전국적으로 지도를 그려놓고 보면 어마어마하게 산재해 있다. 질병관리본부처럼 상시 기구화해서 인력과 역량을 갖춰야 한다. 문제가 터지고 나서 수습하는 것보다 사전에 예방하는 게 비용 부분에서도 훨씬 효율적이다.
예방의학 관점에서 장점마을 사례는 어떤 의미가 있나?
한국 산업화 과정에서 사람은 뒷전이었다. 이제 와서 환경문제가 여기저기서 터지는 건 필연이다. 장점마을을 계기로 관리 모델 매뉴얼을 만들면 좋겠다. 장점마을은 후속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역사적 기회가 될 수 있다.
불행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바람이나 쐴 겸 나섰다. 김세훈 박사(전북대 환경공학과)는 2017년 2월 강공언 교수(원광보건대 보건의료학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지역에 환경문제가 발생한 것 같은데 현장에 같이 가보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런 일’이 일상인 사람들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수락했다. 임형택 익산시의원과 손문선 전 익산시의원(시민단체 좋은정치시민넷 대표)이 동행했다. 문제가 발생한 곳이 사유재산이라 무단침입으로 고소당하지 않으려면 ‘배지’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라3길 3-76. 도착한 곳은 금강농산이라는 비료공장이었다. 김 박사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제가 환경공학 중에서도 폐기물을 전공했어요. 공장에 잠시만 들어갔는데 재료 분진이 온몸에 묻어요. 검댕도 너무 많고. ‘공장이 잘못 운영되고 있구나’를 직감했죠. 그래서 그다음 주에 또 가봤어요.” 강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환경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공장 가동 중에 들어가 봤으면 심각성을 느꼈을 거예요.” 외부 전문가들과 장점마을의 질긴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익산시는 인구 30만 명에 불과한 도시지만 종합대학과 의과대학이 있었다. 지역사회를 돕고 이해하는 전문가가 가까이 있었다. 장점마을의 ‘행운’이었다.

두 달 뒤 주민대책위원회가 김세훈 박사와 강공언 교수에게 ‘장점마을 환경비상대책 민관협의회(민관협의회)’에 참여해줄 수 있는지 물어왔다. 현장을 이미 확인한 터라 외면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은 연구자로써 돕겠다고 했다. 민관협의회는 위원을 구성하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마을 추천으로 합류한 두 사람을 익산시 일부에서 마뜩찮아 했다. 최재철 주민대책위원장은 익산시가 우회적으로 강 교수와 김 박사 교체를 타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관에서 싫어하는 걸 보니 저 두 사람은 꼭 잡아야겠다 했지.”

짚이는 점은 있었다. 강 교수는 익산 내 환경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목소리를 내왔고, 김 박사는 당시 전북녹색환경지원센터 연구원으로 행정 입장에서는 싫어할 만한 연구결과만 내놓고 있었다. 강 교수는 자신이 어디서도 환영받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환경문제 관리는 기본적으로 돈을 까먹는 일이에요. 지방일수록 지자체가 지역 일자리를 만들고 세수도 되는 사업장 유치에 사활을 걸다보니 환경 정책은 계속 퇴보하고 있죠.”

행정의 구멍과 저렴한 땅값, 지방이라는 폐쇄성을 이용한 소규모 공장은 이제 ‘시골’의 풍경이다. 김 박사는 지역에서 환경문제를 연구하면서 그런 공장들이 일으키는 문제를 수도 없이 목격했다. “행정이 관리해야 할 면적이 넓다보니 관리·감독은 산업단지 위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요. 환경문제는 지방자치단체의 주요 관심사도 아니다보니 행정력이 떨어지는 거죠.”

환경부가 역학조사 청원을 검토하는 동안 두 사람은 기존 자료부터 검토했다. 2009년과 2010년 전북보건환경연구원이 오염 시료를 채취한 게 있었다. 당시 전북보건환경연구원은 ‘질병 연관성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 박사는 두 차례 연구가 공장의 특이성을 간과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경험으로 아는 일이었다. “암을 유발할 수 있는 물질은 너무 많은 데 유해 분석 항목은 정해져 있거든요. 법 영역에 없는 항목을 조사하려면 의지가 있어야 해요. 연구 사업을 해봐서 알지만 이게 문제를 유발하는 원인을 찾기 보다는 수치가 넘었냐, 안 넘었느냐를 더 중요하게 따져요.”

금강농산이 2017년 4월 폐쇄되면서 민관협의회 전문가 위원들의 마음도 바빠졌다. 공장이 가동 중일 때도 쉽지 않은 역학조사를 문 닫은 공장을 상대로 해야 했다. 실측이 쉽지 않아 보였다. 속된 표현으로 ‘뭉개고’ 갈까봐 걱정됐다. 그해 7월 환경부가 역학조사를 수용했지만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2018년 1월까지는 아직 반년이나 남은 때였다. 강공언 교수, 김세훈 박사, 임형택 시의원, 손문선 대표가 긴급 토론회를 마련했다. 두 전문가가 기초조사를 하고, 임형택 시의원이 정보공개청구로 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논의를 거듭 진행했다.

이들은 민관협의회를 통해 역학조사 전에 예비조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금강농산은 공장 폐쇄 이후 폐기물 및 설비를 계속 빼가고 있었다. 모두 ‘증거’였는데 막을 방법이 없었다. 시료 확보가 급했다. 문제는 발암 물질이 있다면 얼마나 노출됐는지, 정말 마을 주민들에게 영향을 줬는지를 예비조사로 얼마만큼 확인할 수 있는가였다. “역학조사 개시일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마음은 급했는데 예비조사에서 원인자를 못 찾으면 역학조사에 면죄부를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요. 정말 부담됐죠.”

예비조사 명목으로 예산 2000만원을 어렵게 땄다. 강공언 교수가 대기를, 김세훈 박사가 폐기물을 맡았다. 토양과 지하수 전문가 김강주 교수(군산대 환경공학과)가 합류했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시료를 채취하고 각 샘플을 조사 기관에 보내는 절차마다 제3자를 끼웠다. 결과는 연구자들이 받아보지 않고 익산시로 바로 보내도록 했다.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떤 사람들에게 전문가 위원들은 ‘주민들을 선동해서 용역 따는 연구자’로 매도됐다.

예비조사 결과 지하수, 저수지, 토양 등에서 담배특이니트로사민(TSNAs)과 다환방향족탄화수소류(PAHs) 16종이 확인됐다. 역학조사는 예비조사에 근거해 TSNAs과 PAHs를 중점적으로 검증했다. TSNAs에서는 국제암연구소가 1군 발암물질로 지정한 NNN과 NNK가 나왔다. 다양한 동물실험에서 폐·비강·구강·기관·식도·위·췌장·간·피부에 조직특이적인 발암성 보고된 물질이었다. PAHs 16종 중 확인된 벤조피렌 역시 1군 발암물질이었다.

건강영향평가 결과도 이를 뒷받침했다. 장점마을 주민들의 암 발병률은 모든 암에서 전국 표준인구집단 대비 약 2~25배 높은 범위에 있었다. 각각의 결과 역시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높았다. 최근에 가까운 연도의 누적 암 표준화 발생비는 2000년대 초반에 비해 더 높았다. 특히 담낭 및 담도암은 2008년, 피부암은 2012년부터 발생하기 시작해 집단적 발병으로 파악됐다. 의료비용 지출 역시 인접지역에 비해 1인당 의료비용 지출이 123.2% 높게 나타났다.

환경부는 역학조사 결과를 소극적으로 해석하기 바빴다. 2018년 12월 역학조사를 마치고도 최종 결과를 발표하기까지는 1년 가까이 시간이 더 필요했다. 환경부와 전문가 위원들 사이에 반박과 재반박이 오고가며 힘겨운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역학자인 오경재 교수(원광대 예방의학교실)가 합류하면서 겨우 역학적 인과관계를 인정받았다.

예비조사에서 지하수와 토양을 담당한 김강주 교수는 이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김 교수는 그동안 환경학자들이 끊임없이 요구해왔던 ‘사전 예방의 원칙’이 사실상 처음으로 작동했다고 말했다. “그동안은 사전 예방의 원칙이 굉장히 사치스러운 개념이었어요. 문제도 안 터졌잖아? 법도 없잖아? 그냥 법대로 해. 그렇게 하면 대부분 업체가 이겨요. 법이 완벽하지 않아요. 최소한의 요건이 법이에요. 외국의 경우 형사상 문제는 직접적 증거를 요구하지만 환경문제는 사회문제로 인식해 증거의 우세성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요. ‘의심하기에 충분하다’면 의심 받는 쪽(기업)에서 자신이 아니라고 증명해야 해요. 장점마을 역학조사가 그런 결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진짜 획기적인 사건이에요.”

불행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불행을 경험한 사람들은 문제를 인식하고 개선하려 노력한다. 장점마을 주민들이 금강농산과 싸운 17년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김세훈 박사는 장점마을이 이 과정을 통해 동네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기를 기대했다. “장점마을은 ‘집단 암 마을’이라는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기 마을의 가치를 봤어요. 암의 대명사가 됐지만 공동체가 힘을 합쳐서 문제를 해결했죠. 후속 조치가 제대로 이뤄진다면 나중에는 암을 치료하러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 수도 있어요. 왜냐면 장점마을 주민들이 자신들의 암을 치료하기 위해 먹거리와 생활방식을 바꿀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새로운 사람들이 와요.”

최재철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은 마을 곳곳에 해바라기를 심고 싶다. 어디선가 해바라기가 땅의 독성을 빨아들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해바라기의 꽃말이 마음에 들었다. ‘프라이드(pride)’, 긍지와 자부심을 뜻했다. 지금은 집단 암 마을이라는 낙인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언젠간 그 낙인이 마을을 바꾸는 전환의 힘이 될 거라 믿는다.

자빠지지 말라고 이름을 ’세모’라고 지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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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꽃 필 무렵>
이 기사를 함께 만드신 분들
나경희 / 장일호
사진 및 영상 촬영
이명익
영상 제작
김민수, 엄지효, 박리세윤
디자인 및 구현
스튜디오 벨크로